이든 칼럼

남을 깎아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들

오랜만에 만났는데 첫마디가 “너도 이제 배가 나왔네”였습니다.

카페에서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남자가 손을 흔들며 마주 선 키 크고 체격 좋은 남자의 배를 가리키고, 말을 들은 남자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며 어리둥절해하는 삽화
“오랜만이야! 너도 이제 배가 나왔네~”배가 더 나온 사람이 건넨 첫인사입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나간 자리였는데, 인사 한마디에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습니다. 말한 사람은 아마 친근함의 표시였을 겁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웃으며 넘겨도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습니다. 상대가 기분이 상했다는 걸 정작 말한 본인만 모릅니다.

대화 속에서도 이어지는 깎아내리기

이런 분들은 대화 중에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합니다.

  • 사진을 잘 찍는 사람에게: “카메라가 좋아서 잘 나오는 거지.”
  • 람보르기니를 산 사람에게: “나는 문이 위로 열려서 안 사.”
  • 좋은 향수를 산 사람에게: “그거 비싸기만 하지, 홍대 가면 개나 소나 다 뿌리고 다녀.”
  • 남의 집에 놀러 가서 반갑게 꼬리 치는 강아지에게: “너도 이제 많이 늙었네.”

“문이 위로 열려서 안 산다”는 말은 사람들이 농담처럼 흔히 하는 말이라, 혼자 할 때는 웃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 차를 산 사람 앞에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큰마음 먹고 장만한 향수를 “개나 소나 뿌리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아지에게까지 그런 인사를 건네는 걸 보면, 이건 상대를 가리는 말이 아니라 몸에 밴 말버릇인 듯합니다. 그 말을 옆에서 듣는 강아지 주인의 표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상대의 실력은 장비 덕으로, 상대가 가진 것은 내 취향이 아닌 것으로 바꿔야 마음이 편해지는 모양입니다.

깎아내리는 말의 세 얼굴: ① 인사형 '너도 이제 배가 나왔네' - 속마음: 나만 나이 든 게 아니라고 확인하고 싶다 ② 공 돌리기형 '카메라가 좋아서 잘 나오는 거지' - 속마음: 저 사람 실력을 인정하기 싫다 ③ 핑계형 '나는 문이 위로 열려서 안 사' - 속마음: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어 불편하다. 잘된 사람을 봄 → 깎는 말 → 잠깐 편해짐이 반복됨
겉으로는 인사나 농담이지만, 아래에는 다른 마음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진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기보다 잘된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서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 불편함이 깎아내리는 말이 되어 나옵니다. 본인은 싫어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리학이 설명하는 세 가지

1. 자존감이 흔들리면 남을 깎아 스스로를 지킨다

1997년 미국의 심리학자 페인(Fein)과 스펜서(Spencer)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더 박하게 평가했고, 그렇게 남을 깎아내리고 나자 이들의 자존감이 다시 올라갔습니다. 반대로 미리 자존감을 채워 준 사람들은 남을 덜 깎아내렸습니다. Fein & Spencer, 1997

남을 낮추는 말이 사실은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지키는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2. 키 큰 양귀비 증후군 (Tall Poppy Syndrome)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널리 쓰이는 말입니다. 밭에서 혼자 키가 큰 양귀비를 잘라 높이를 맞추듯, 잘된 사람을 끌어내리려는 심리를 가리킵니다. 심리학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태도를 따로 측정하는 연구가 있을 만큼 오래된 주제입니다. Flinders University

자기보다 잘된 사람, 많이 가진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불편해하는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3. 칭찬처럼 들리는 깎아내리기 (Backhanded Compliment)

“너도 이제 배가 나왔네”,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었네”처럼 인사나 친근함의 모양을 빌려 상대를 낮추는 말을 영어권에서는 ‘뒤로 건네는 칭찬’이라고 부릅니다. 말하는 사람은 친한 척이라고 생각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작은 공격으로 남습니다. 겉모양이 인사라서 대놓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는 점이 더 얄궂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런 말버릇을 지능과 연결한 연구는 찾기 어렵습니다. 연구들이 공통으로 짚는 원인은 열등감, 남과 비교하는 습관, 그리고 상대의 기분을 읽는 능력의 부족입니다. 그래서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 중에도 이런 말버릇을 가진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과는 굳이 가깝게 지내지 않는 편입니다. 한두 번은 웃고 넘길 수 있지만, 만날 때마다 조금씩 깎여 나가는 느낌은 쌓이기 마련입니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과 보내기에도 시간은 충분히 짧습니다.

좋은 인사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반가워요, 잘 지냈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참고: Fein & Spencer (1997), Prejudice as self-image maintenance · Feather (1989), Attitudes towards the high achiever: The fall of the tall poppy · Psychology Today, Aussie Check Mate

이든 칼럼은 직접 겪은 일에 관련 자료와 연구를 더해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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